[현대는] 정체성을 숭배하는 극장이 되어버렸다. 청교도적 수치심 정치ー마치 억압을 축복인 것 마냥 물신화하고, 도덕주의적 광분으로 혼탁하게 만드는 정치는 우리를 차갑게 식게 만든다. 우리는 깨끗한 손도, 아름다운 영혼도, 미덕도, 공포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오염의 탁월한 형식을 원한다.
─라보리아 큐보닉스 〈제노페미니즘: 소외를 위한 정치학〉(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옮김, 미디어버스)
밀레나, 우리는 한 가지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우리는 너무나 수줍어하고 불안에 싸여 있지요. 매 편지가 거의 다르며 거의 모든 편지가 전번 편지에 대해, 또 그 답장에 대해 더욱 놀라고 있습니다. (..) 때로는 우리가 두 개의 문이 마주 달린 하나의 방을 쓰고 있는데, 각자가 문고리를 잡고 한 사람이 속눈썹만 깜박거려도 벌써 다른 사람은 자기 문 뒤로 숨어 버리는 것 같은 인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첫 사람이 단 한마디라도 말을 할라치면 둘째 사람은 벌써 자기 뒤에 문을 꼭 잠가 버려서 모 습조차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방은 떠나 버릴 수가 없는 것이기에 다시 문을 열 것입니다. 첫째 사람이 둘째 사람과 아주 똑같지 않다면 좋으련만. 그가 침착하고, 외견상으로나마 둘째 사람을 전혀 쳐다보지도 않으며 그 방이 각자 다른 방인 것처럼 서서히 방을 정돈한다면 좋으련만. 그러는 대신에 각자는 자기 문 뒤에서 똑같은 짓을 행하고 있지요. 그래서 때로는 두 사람이 모두 문 뒤에 숨어 버려, 그 아름다운 방을 텅 빈 채로 내버려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편지: 밀레나에게〉(이인웅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장르는 욕망의 일부를 붙잡아서 만들어낸 대상이고, 욕망이 모여서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매혹의 장소이고, 욕망이 더 충족되지 못하는 한계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더 많은 걸 욕망하게 만드는 좌절의 장소이다. 장르를 통해 우리는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장르의 안팎에서 욕망은 들끓고 흘러넘친다. 장르는 욕망을 구획하고, 욕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 틀에 들어맞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감각까지도 남긴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장르는, 결국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잔여로, 좌절로 우리를 이끈다. 사랑하지 않는 장르에 좌절할 이유는 없고, 사랑하는 장르에 좌절하지 않을 일도 없다.
─안희제, 〈사랑은 망한다─장르의 잔여, 붙잡을 수 없는 욕망〉(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여름)
“단지 우리가 마지막에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는 그것만을 우리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와 이 세계에서의 삶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때에만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김인순.박희석 옮김, 필로소픽)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사람의 비극은 자신이 기록의 방해 요인들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고 나는 감베티에게 말했다. 이 비극은 희극이기도 한데, 완벽한 희극인 동시에 비열한 희극이지요.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류은희.조현천 옮김, 현암사)
일상적 정동에 천착한다는 건, 변덕스러운 동시에 굳건하고 간사하고 불안정하면서도 명백한 사물들 안에 힘들의 잠재력이 어떻게 내재하는지 더듬어보는 일이다. 일상적 정동은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이며,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할뿐더러 상징적 의미들보다 훨씬 까다롭고 다양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일상적 정동은 하나의 고정된 분석 차원에 늘어놓을 수 있는 분석 대상 같은 것이 아니며, 분석적 주제와 개념과 세계 간 완벽한 삼중 병렬법에 가담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이질적인 현장들과 부적당한 형태들과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문제 또는 질문, 즉 가능성 관계들의 얽힌 지점이다.